여러분은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우리의 정치적 성향은 '진보'나 '보수', '1번'과 '2번'과 같은 단순한 선택지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입장 이면에, 어쩌면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약 2년 전,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매우 신선한 컨셉의 프로그램이 공개됐습니다. 순수하게 '정치'를 주제로 기획한 서바이벌 사회 실험,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였죠. 처음엔 반응이 잠잠하다가 몇 개월 뒤 화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뒤늦게 유튜브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보기 시작했었는데요. 1화를 보자마자 창의적이면서도 대담한 기획에 매료되어 급격히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 '젠더', '계급'과 같은 이슈들은 모든 사람이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불편함 때문에 공적 대화에서는 좀처럼 꺼내지 않던 주제였습니다. 저 또한 이에 대해 종종 혼자서 생각할 뿐, 누구와도 제대로 토론해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그런 이슈들을 아예 전면에 내세워 전체 구조의 중심에 놓고, 출연자 한 명 한 명의 캐릭터를 만드는 지표로 삼았습니다. 모든 출연자가 ''보수 정치인', '페미니스트', '부유한 유학생'과 같은 라벨을 단 채로 시청자에게 소개되면서 프로그램이 시작됐죠. 온라인 세계에서 들끓던 갈등을 한낮의 밝은 장소에 꺼내와, '우리 진짜 제대로 이야기 좀 해보자' 하고 대화를 청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6월, 이 프로그램의 담당 PD였던 권성민 PD가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 각자의 현실 너머, 서로를 잇는 정치를 향하여』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습니다. 프로그램에 만들 당시의 문제 의식과 기획 의도에 대해 밝히는 글이었습니다. 저 역시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함께 사회를 분석하고 관찰하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읽는 동안 나의 '본능적인 정치적 성향', '타고난 사회적 지위', '젠더 갈등에 대한 입장', '소수자에게 느끼는 감정' 등을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었고, 나는 이 사회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권성민 PD가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 출연자들을 분류하기 위해 만든 사상 검증 테스트는 지금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열려 있습니다. (책 내용에 의하면, 권성민 PD는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일반인들의 데이터를 계속 모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문적으로 검증된 테스트는 아니겠지만, 질문 하나 하나가 너무나 시의적이라, 답을 고르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테스트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해보시길 추천 드려요.
이 글에서는 저의 사상 검증 테스트 결과지를 공유하고, 제가 서 있는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사상 검증 테스트 링크 → https://thecommunity.co.kr/home
[더 커뮤니티]사상검증 테스트
나의 사상은 어떨까? 지금 사상검증 테스트 해보기
thecommunity.co.kr
우선 저의 결과지부터 공개하겠습니다. 저는 이 테스트에 의하면, 네 가지 척도에서 각각 ‘좌파’, ’페미’, ’부유‘, ‘개방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LFUO 유형이라고 합니다.

1. 정치 : 좌파 > 우파
정치 영역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태도를 측정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부의 재분배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이고, 복지제도를 통한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큰 정부'의 입장일수록 빨간색의 '좌파'로 분류됩니다.
정부가 개인의 노력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자유시장경제의 경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작은 정부'의 입장일수록 파란색의 '우파'로 분류됩니다.
- '정치' 영역에 대한 설명 (출처 : https://thecommunity.co.kr)
정치에 대한 생각부터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왼쪽으로 꽤 분명하게 기울어진, ‘좌파 2’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숫자만 보면 꽤 견해가 뚜렷할 것 같지만, 사실 저는 정치적 입장이 늘 선명한 편은 아닙니다. 본래 성향 자체가 편을 갈라서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고, 외부를 향해 행동하기 보다는 혼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집중하는 걸 더 선호합니다. 회사에서도 가능하면 정치적 상황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하고, 큼직한 사건이 있을 때나 역할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만 선택적으로 움직이곤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주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남용해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할 때입니다. 이때 관찰자 역할에 머무르거나 중립을 유지하면, 결과적으로 권력이 있는 강자에게 유리한 판이 유지됩니다. 권력이 마음껏 뛰놀 공간이 생기고, 그 구조를 떠받치는 비용은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전가됩니다. 전 이런 상황은 잘 참지 못해서, 결국에 반대 입장을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면 때문에 테스트에서도 “좌파적 성향이 더 크다”고 나온 것 같습니다.
보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는 개인의 자유에도 민감한 편이고, 능력주의 역시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약하거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 한국은, 약자뿐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부와 권력의 배경 없이는 잠재력을 발현하기 어려운 매우 불평등한 사회입니다. 이 가파른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적 가치를 사회 구성원들이 내재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지금 저의 현재 입장입니다.
이런 상황에, 한국 정치가 계속해서 '선'과 '악'의 구도로 소비되는 현실은 많이 아쉽습니다. '악을 처벌하는 선'의 역할에 머무르는 좌파는 지속적인 변화 동력을 갖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탄핵 국면처럼 특정 세력을 몰아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선동하기 쉽지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율의 과정에서는 관심과 지지가 쉽게 사그라듭니다. 어쩌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바로 그 지점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이는 제가 한국의 정치 담론에 좀처럼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입장을 어떤 언어로,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줄 '위임자'로서 지지하는 정치 세력은 있지만, 그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도덕적 우월성을 더 강하게 내세우는, 더 진보적인 세력에게 마음이 가지도 않고요. 언젠가는 나 같은 사람을 대변해줄 정치인도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면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나름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념을 세우려 하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감각과 흐름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젠더 : 페미니즘 > 이퀄리즘
젠더 영역은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태도를 측정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남성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할수록 빨간색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됩니다.
반대로, 이미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차별은 대부분 해소되었으며, 두 성별 각각이 경험하는 세부적인 불평등을 동등하게 해결해야 하므로 여성 차별만을 주장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입장일수록 파란색의 '이퀄리즘'으로 분류됩니다.
'이퀄리즘'은 학문으로 분류된 용어는 아니며,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진영이 위와 같은 취지로 언급한 용어를 차용하였습니다.
- '젠더' 영역에 대한 설명 (출처 : https://thecommunity.co.kr)
젠더 갈등, 어쩌면 정치 갈등보다도 더 민감한 이슈죠.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에서도 각각의 출연자의 유형이 공개될 때,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가 색깔로 표현되는 부분이 가장 자극적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온라인에서 서로 간에 원색적인 비난이 자주 오가는 주제이다보니, 오프라인에서 저 얘기를 어떻게 할까 정말 궁금하기도 했죠. 저는 '페미 2'라는 테스트 결과에서도 보이듯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쪽이지만 젠더 갈등 자체에 대해 꽤나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아홉 살 이후로, 가정 안에서 젠더 갈등을 경험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자랐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엄마, 언니, 저, 여동생, 이렇게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사실상 경제활동과 육아를 모두 전담했기 때문에 성 역할이랄 게 없었고, 그런 엄마를 보며 저희 세 자매도 어른이라면 저 모든 역할을 다 해내야 한다고 은연중에 학습하며 자랐습니다. 젠더 문제가 개인의 삶에 처음 새겨지는 장소가 주로 가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특수한 가정에서 자란 저에게는 페미니즘에서 하는 얘기가 한번에 확 와닿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의 말과 행동이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 변화의 많은 부분이 페미니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의 남성은 대부분 권위적이다’ 와 같은 주장이 과하다고 느꼈지만, 수차례 이야기를 통해 그 친구가 삶에서 실제로 겪은 일들을 알게 되면서 이해가 가는 지점들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중심을 바로 세우며, 힘을 회복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관점일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이 조금 열렸어요.
이후 젠더 문제를 저 자신의 이슈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가족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어릴적 차별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사회에 조금씩 노출될수록 그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제가 일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엄마가 결혼 후 저희 세 딸을 혼자 키우기로 결심하기까지 해온 선택들도 하나 하나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세대가 견뎌 온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그림자가 우리 가족에게도 일부 드리워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에 적대감을 느끼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저 또한 어릴 때 겉보기에 예민하고 날카로운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고 거부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결국 “차별은 존재한다(적어도, 존재했다)”는 전제를 인정하게 되었고, 나만의 현실 인식과 입장을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페미니즘적 입장에 있는 작가의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입장을 접할 때마다, 내가 왜곡되어 있는 건지, 이 사람이 왜곡되어 있는 건지,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열심히 살피곤 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여성들이 감당해 온 차별과 폭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오면, 남녀차별이 예전에 비해 많이 완화되었다고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비해 ’가시화된 차별‘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건 더 많이 이야기해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별은 없다, 문제가 없다, 여성이 단지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거다’라는 입장은, 역사의 맥락을 무시하고 ’지금 당장’ 서로의 이해득실만 따지자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합니다.
소수자,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빼앗는 가장 쉬운 방법은 혐오 프레임을 씌우는 것입니다. 어느 진영이나 과한 발언을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데, 그 사람들의 대표성을 과장해서 ’저들은 선을 넘는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친다, 화가 많고 공격적이다‘ 라는 편견을 씌우는 것이죠. 그동안 한국에서 젠더 갈등처럼 일상적 차별을 둘러싼 강자-약자 구도가 전면에 드러난 사례가 많지 않았던 탓에, 프레임 전쟁에서 약자 쪽이 수를 쓰지 못하고 ’패배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결과 여전히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동의하지는 못할지라도, 혐오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잘 들여다보면 혐오할 만한 주장이 아닌데, 페미니즘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남성뿐 아니라 일부 여성들에게도 퍼져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나까지 혐오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공들여 쓴 글을 들춰보지조차 않습니다. 혐오를 내려놓고, 대화부터 했으면 좋겠습니다. 혐오로 인한 소통의 단절이 장기화될수록, 젠더 갈등은 본질적인 해결책에 가닿지 못하고 앞으로 수십년간 정치인들의 선거철 도구로만 소비될지도 모릅니다.
3. 계급 : 서민 < 부유
계급 영역은 현재의 경제적 상황이 아닌, 어릴 적의 경제적 출신과 태도를 측정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인 소득이 적은 환경 출신이자 이와 연관된 태도를 많이 유지할수록 빨간색의 '서민'으로 분류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라고, 금전적인 문제를 겪을 기회가 적은 입장일수록 파란색의 '부유'로 분류됩니다.
- '계급' 영역에 대한 설명 (출처 : https://thecommunity.co.kr)
사상 검증 테스트를 직접 해보면 아시겠지만, 이 영역은 다른 세 영역과는 측정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다른 문항들은 '나의 견해'를 묻는 반면, 계급 척도와 관련한 문항들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 경험'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대학 시절의 주된 기억 중 하나가 아르바이트였나요?", "성인이 되기 전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나요?", "가족/친척들이 전반적으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편인가요?" '그렇다', '아니다' 라는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고른 적 없었던' 답을 체크하게 됩니다. 저도 가끔씩 문항을 만드는 일을 해서 그런지, 이 대목에서 '고민을 많이 하셨구나, 문항 구조가 정말 탁월하다' 고 느꼈습니다.
계급적 환경은 확실히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바꾸기도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언제든 새로운 이념이나 입장에 동의할 수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은 계급을 통해 학습된 감각으로부터 좀처럼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나 자신이 되는 길을 찾겠다" 외치다가도, 진학·취직·결혼과 같은 중요한 선택 앞에 서면 결국 부모님이 오랜 시간 중시해 온 가치 - 학벌, 직업, 경제 수준 등 - 를 버리지 못합니다. 대학생 시절, 졸업을 앞두고 이런 이유로 의외의 선택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책에서 읽은 문장이나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중요하지만 결국에 사람의 삶에 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건 계급적 조건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가정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희 가족은 학력은 매우 중시하지만, 돈이나 성공에는 비교적 무심한 편입니다. 좋은 학력이 가져다주는 기회와 안정성에는 취하되,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경쟁에는 거리를 두고, 세속적 욕망보다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십 대에는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거나 벗어나고 싶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하지만 막상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보려고 하면 몸에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지금도 지나친 경쟁은 경계하되,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업과 지위를 유지하는 삶을 택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환경을 조금 덧붙이자면, 저희 가족은 눈에 띄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경제적 압박을 느낄 만한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대학생 때 장학금을 받으려고 애쓰긴 했는데, 이는 가난에 쫓겨서라기보다는 생계를 혼자 감당하고 있는 엄마의 부담을 덜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십 대 중반까지 돈이 내 인생을 좌우할 거라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고, 학부 졸업 후 유학이라는 선택지가 내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경제적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잘 사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테스트에 의하면 이 정도의 환경은 '부유 2'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한국 사회에서 '부유'한 쪽에 속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건 어릴 적부터 계급에 의해 분리된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열일곱에 특목고에 진학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경험이 그 감각을 더욱 굳혔을 것이고요. 가끔씩, 제가 진보적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태도가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자란 결과는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행동하지 않는 쪽을 택할 수 있고, 원할 때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당장 큰 불편이 없고, 가족이라는 보호 장치가 있으며, 현재 가진 것들로 어느 정도는 버텨낼 수 있기에, 행동을 유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제가 진보적인 입장에 선다고 말하는 건 위선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안정적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방향' 에도 동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 시간이 흐른 후 결국엔 위선이었다는 답이 내려질 수도 있겠죠. 실제로 부유한 사람들이 대외적으로 선한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사람들은 이제 누군가의 계급적 환경을 근거로 처음부터 진정성을 의심하곤 합니다. 특히 정치인에게 이런 잣대가 자주 적용되죠.
저는 '부유'한 사람들이 위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데 동의합니다. 다만 그것은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싶어요. 진짜 문제는 권성민 PD도 지적했듯, '서민' 쪽에 있는 사람들이 정치적 무대에 자주 서지 못해 대표성이 왜곡되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경험상, 부유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잘 상상하지 못하고, 그 결과 약자성을 띤 서사를 본능적으로 타자화합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데 분명한 한계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유'한 쪽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계급적 한계를 인식하고, 나서기보다는 듣는 쪽에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4. 개방성 : 개방적 > 전통적
개방성 영역은 사회적 소수자와 새로운 윤리규범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측정합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지지하고, 기존의 윤리규범을 대체하는 새로운 윤리규범에 거부감이 적은 입장일수록 빨간색의 '개방적'으로 분류됩니다.
소수자보다는 다수의 입장을 중시하고, 새로운 질서보다는 기존의 윤리규범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일수록 파란색의 '전통적'으로 분류됩니다.
- '개방성' 영역에 대한 설명 (출처 : https://thecommunity.co.kr)
마지막 개방성 영역은, 우리 사회가 가장 미성숙한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양성에 대한 경험치가 굉장히 부족한 나라입니다. 단일 민족이라는 특성 때문도 있겠지만, 특정한 성공 모델이 강요되는 분위기 속에서 정상성의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해진 탓도 큰 것 같습니다. 정치, 젠더, 계급에 관련해서는 그나마 여기저기서 진지한 논의가 오가는 반면,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등 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갈등의 장에조차 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계엄을 계기로 사회의 에너지가 정치 갈등에만 집중되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희미해진 듯합니다.
테스트 결과, 이 영역에서 저는 '개방 2'가 나왔습니다. 평소의 생각을 기준으로 하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과연 내가 개방적인 사람이 맞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 안에도 늘 '낯선 것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저는 유독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였습니다. 외국인이 말만 걸어도 울음을 터뜨렸고, 경상도 사투리가 낯설다는 이유로 외할머니·외할아버지를 무서워하곤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지적 장애가 있는 반 친구를 다른 친구들과 동등하게 대하지 못했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동성애 영화 포스터를 발견했을 때는 두려움에 가까운 혐오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낯선 것에 대한 혐오 또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그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요.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혐오를 '다루는' 힘은 결국 다양성에 대한 경험치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스스로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할 때 더 강렬하게 각인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교환학생으로 6개월간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 머물렀을 때, 저는 아무 노력 없이 '주류'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낯선 동양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이 사회에 섞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도전이 필요할까 싶어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20대 중반에는 한국에서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당시 저는 모범적인 진로를 밟아오는 동안 내면에 많은 감정을 억압해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억눌려 있었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다보니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했고, 1-2년 정도 정신과 진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사회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 방식이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그 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많이 허용했는데, 그 내용이 누군가에게 드러나는 순간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이 감각은 자기혐오의 감정으로 이어지지도 했죠.
이런 경험 덕분에, 저 또한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느낄 때 그 감정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혐오할 만한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자라면서 학습한 어떤 사고의 틀이 혐오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혐오에 노출되어 있는 소수자들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듯한 막막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감과 수치심, 무언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아마 자기 이야기를 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거대한 벽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은 용기와 각오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제가 느끼는 한 순간의 혐오감은 너무나 가볍고 사소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당하는 쪽, 힘이 없는 쪽은 심리적으로 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들을 사회가 조금 더 너그럽게 대해주면 좋을텐데, 현실에서는 오히려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서글퍼집니다. '세상의 많은 흑인 아이들이 스스로를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는 현실'보다, '내가 생각한 인어 공주가 나오지 않아 영화를 보며 실망한 사건'이 정말로 더 큰 재앙일까요? '장애인이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해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현실'보다, '내가 어느 날 시위 때문에 하루 회사에 지각한 사건'이 정말로 더 큰 재앙일까요?
여전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보다는 지금 당장 개인적 이득과 손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공동체의 일보다 나의 일이 더 중요해!' 이런 이기심으로 똘돌 뭉쳐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아마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는 반면, 자신의 경험은 너무나 피부에 와닿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좀 더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아직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LFUO 유형이어서 자주 마주하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제 주변에는 계급 척도에서 ‘부유’에 해당하는 사람이 비교적 많습니다. 이들 중에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이 자주 취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든 존중해. 하지만 그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진 않았으면 해.” 얼핏 보면 개방적이고 온건해 보이지만, 저에게는 가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나랑은 상관 없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는 선 긋기로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 괴로움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해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순간에 묵음 처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입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되뇌는 생각이 있습니다. "입장이 취향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개개인의 취향은 서로 그저 존중하면 되지만,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싸워서 부딪치든, 양보해서 좁혀나가든, 그 과정 속에서 최소한의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영구적인 합의가 불가하다면 일시적인 합의라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어느 쪽으로든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부유'한 사람들이 입장을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여기고 여유롭게 넘어갈 수 있는 건, 이미 비교적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금기시하지 않고, 조금 더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현실감 있게 경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계속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끝으로,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장을 전해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치는 곳에서 자신의 당위와 무결함을 확인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함께 발을 디디고 있는 땅에서 합의점을 찾아내고 각자가 꿈꾸는 사회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고 상대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오답일 수도 있는 상대의 생각 자체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령 오답이라 할지라도 그가 왜 거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내 의견을 더 잘 관찰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권성민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돌고래, p11
| 6. 롱폼 콘텐츠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0) | 2025.10.28 |
|---|---|
| 5. 건축을 좋아했지만, 건축을 계속하지 않았던 이유 (0) | 2025.10.28 |
| 4. 탈서울 : 서울 바깥에서 비로소 흐르는 가능성 (0) | 2025.10.28 |
| 2. 참을 수 없는 친절에 관하여 :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1) | 2025.10.28 |
| 1. 정서의 흐름이 가리키는 일상의 모양 (0) | 2025.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