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숏폼과 롱폼 중 어떤 콘텐츠를 더 즐겨 보시나요?
아무래도 요즘은 롱폼보다는 숏폼의 시대 같습니다. 숏폼 콘텐츠들의 퀄리티가 날이 갈수록 빠르게 상승하는 게 느껴지고요.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만큼, 모든 콘텐츠가 정말 감각적이고, 센스 있으며, 직관적이고, 질감도 한껏 살아 있습니다. 한국에 이렇게 재능 있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많다니, 새삼 신기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굳이 따지자면, ‘숏폼형 인간‘보다는 ’롱폼형 인간‘에 가깝습니다. 긴 콘텐츠를 볼 때 왠지 더 큰 안정감이 느껴져요. 유투브 영상도 재생 시간이 20-30분은 넘어야 클릭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회차가 많은 드라마나 예능을 라디오처럼 틀어두기도 합니다.
긴 영상은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또렷하게 정리되어 있기보다는, 여러 줄기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교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덕분에 보는 동안 틈틈이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런 생각들이 둥둥 떠다니게 두면서 흘려보내는 시간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 같아요. 그에 비해 5분, 10분짜리 영상들은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바로 또다른 영상을 클릭해야 한다는 게 왠지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취향은 취향일 뿐, 요즘은 숏폼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콘텐츠로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아요. 영상, 글, 이미지 등 매체를 막론하고,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들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한 지식과 감이 없으면 뛰어난 콘텐츠 제작자로 인정받기 어렵고요. 회사 안에 있으면 그런 걸 더 많이 체감합니다.
저는 콘텐츠를 전문으로 다루는 직무는 아니지만, 종종 외부로 발행되는 아티클이나 리포트를 써야 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마다 '내용은 너무 좋은데…', '길다', '텍스트가 너무 많다',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쉬운 단어로 바꿔달라', '읽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써달라', 등의 피드백을 반복해서 받곤 합니다.
기업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보니 이런 시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드백을 받으면 끝까지 반영하려고 애쓰곤 합니다.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여도 텍스트 양이 과해지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대신에 즉각적 재미를 줄 수 있는 그래픽 전략을 함께 수립하곤 합니다. 문장을 쓸 때도 읽는 경험이 걸림 없이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1차, 2차, 3차,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문득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를 너무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 아닌가, 어려워도 한 번 더 읽어주고, 길어도 찬찬히 따라와주는 독자를 전제해보면 안 되는 걸까, 고민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짧은 콘텐츠를 선호할까요?
저도 생각해보면, 종종 어렵거나 긴 글을 포기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 겨울, 미셸 푸코의 『권력과 공간』(문학과지성사)을 읽으려고 해봤는데요. 어려운 문장 때문에 애를 먹다가 다 읽지 못한 채로 책을 반납했습니다. 또 작년 봄에는 어느 책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조지 엘리엇을 묘사한 문장에 감명을 받아 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를 읽기 시작했는데, 자꾸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이야기의 호흡이 늘어져서 몰입이 끊기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이 남진 않았습니다. 이야기 속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얻으려면 깊은 집중력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당장 읽는다고 상상하면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현대 직장인들의 여가 시간은 1-2시간 단위로 잘게 쪼개져 있습니다. 긴 시간을 일이 아닌 다른 대상에 지속적으로 쏟아붓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콘텐츠에 마음이 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 같아요. 짧은 콘텐츠는 그것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결론이 납니다. 성공하면 만족감이 즉각 오고, 실패해도 바로 다른 걸 찾으면 되니 리스크가 적습니다.
그에 비해 긴 콘텐츠는 내가 언제 어떤 시점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불확실합니다. 여러 메시지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데, 그걸 다 받아들이느라 에너지를 쓰다보면 ‘이게 과연 가치가 있는 걸까? 시간 낭비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합니다.
그렇기에 분명히 이 시대에는 짧은 콘텐츠가 영향력을 가집니다. 인스타 피드, 클립 영상, 직관적인 카피 등으로 작게 쪼개진 시간 속을 침투해야 사람들의 마음 속 공간을 차지할 수 있죠. 하지만 짧은 콘텐츠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결국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짧은 콘텐츠들이 지향하는 ‘쉬움’, ’매력’, ‘직관적임’, ‘매끄러움’ 등의 속성들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긴 하지만 마음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습니다.
과거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던 책들을 떠올려보면, ‘무언가 걸리는 느낌’, ’불편한 느낌’, ‘알 듯 말 듯한 느낌‘, ‘뭔진 모르겠지만 따라가보고 싶은 느낌’ 같은 게 떠오릅니다. 그런 느낌을 숏폼 콘텐츠가 제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 과연 짧고 쉬운 문장만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요?
이곳에 혼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의 길이와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습니다. 처음엔 짧고 가벼운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며 시작했는데, 자꾸만 긴 글을 써내려가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아무래도 난 한 번에 단순하고 명쾌한 사람이 될 수 없구나‘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짧고 단순한 글을 쓰려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체 머릿속 생각이 복잡하고 가지가 많다보니 단숨에 짧은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길게 쓴 다음, 쳐내고 다듬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해야 해요.
한 편의 글을 완성할 때마다 ‘또 길어졌네‘라는 생각부터 떠오릅니다. ‘결론이 더 명확해야 할까?‘, ’명료한 흐름만 남기고 다 쳐낼까?’, ’요지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중간 중간 소제목 같은 걸 달아줄까?’ 뭔가를 더 고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회사에서 쓰는 글이라면 곧바로 그 작업으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왠지 이곳에 쓰는 글만큼은, 일단 그대로 두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소 장황하고 모호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이런 수정을 매일 하는데, 집에 와서도 그러자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장 하나 하나에 담긴 생각의 파편들이 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두고 싶어집니다.
이는 제가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길게 늘어진 콘텐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목적 아래 명료한 메시지를 짧고 굵게 밀고 나가는 걸 좋아하죠. 특히 기업들은 콘텐츠와 소비자 사이에 괜한 ‘틈‘이 생기는 걸 부담스러워합니다. 틈을 허용하지 않고 사고의 과정을 컨트롤해야 소비자로부터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어서겠죠.
그럼에도 롱폼 콘텐츠가 계속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시장 때문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플랫폼에서 이야기가 주는 경험의 가치를 쫓는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롱폼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고, 또 잘 생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 보고 싶어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올 한 해,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곁에 두며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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