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나답게 잘 살고 있는 걸까?“
정신 없이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씩 떠올리게 되는 질문입니다. 주어진 하루 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문득,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지금의 이 길이 내가 정말로 바랐던 길이 맞는지 궁금해지는 시점이 오죠. 그럴 때 우리는 지금의 생활을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똑같이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살고 있다 해도, 그 속에서 나의 기질(Charactor)이 얼마나 발현되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느낌이 사뭇 다를 수 있으니까요. 어떤 때는 뭔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안정감과 함께 온몸에 생기가 도는 반면, 어떤 때는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듯한 어색함 속에서 나를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최근 저는 철학자 마리 루티(Mari Ruti)의 『가치 있는 삶(원제 : The Call of Charactor)』을 읽고,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다가가는 방법에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3월 제주로 여행을 갔다가 ‘공항서점’이라는 독립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요. 띠지에 적힌 문구 (“루티의 손에서 우리의 불완전함은 절망이 아니라 매력과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 - 린 허퍼, 에머리대 교수) 에 마음이 끌려 구입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날카롭고 시의성 있는 철학서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즐겁고 편안한 삶‘ 만을 좋은 삶이라고 여기는 문화적 기조 때문이라는 주장은 저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나답게 살아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안과 갈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삶이 더 가치 있는 것이다‘ 라는 루티의 말이 신선하게 다가오면서도 직관적으로 공감이 갔던 것 같아요.
균형 잡히고 차분하며 평온한 삶에 대한 우리 문화의 이상은 상당히 공허해 보인다.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삶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나는 안정을 추구하기보다는 다소 전전긍긍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치려는 삶 역시 어떤 장점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을유문화사, p45
그렇다면, 마리 루티가 독자에게 제안하고 싶어했던 삶의 방식은 어떤 걸까요? 이 글에서는 제가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느꼈던 네 가지 개념 - 기질(Charactor), 욕망(Desire), 큰사물(the Thing), 사건(Event) - 을 중심으로, 루티가 말하는 삶의 방식을 간단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기질(Charactor)
먼저 기질이란, ‘어떤 사람을 바로 그 사람답게 만드는 무언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나답게 살고 싶다’,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 라고 할 때 그 ‘나‘를 기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기질은 사회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기준에 맞게 정제되거나 억압되곤 하는데요. 마리 루티는 기질이 사회에 의해 억눌리지 않도록 살려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짜 나’라는 것이 어딘가에 완성된 형태로 고스란히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티는 기질이란 불변하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어딘가 ‘진짜 나’가 기다리고 있어서 거기에 도달하기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면서 발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질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고정적인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진정성”이란 특정 성격의 특성이나 속성이 아니라 삶의 방식,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진정성은 우리 존재에 대한 어떤 영구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특징인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에 우리가 어떻게 발을 내딛을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숨겨진 핵심을 지하 감옥에서 해방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아직은 잠재력에 불과한 자아의 다양한 모습을 발달시키려는 노력에 가깝다. 우리의 가짜 자아와 내면에 억눌린 기질의 불가사의한 본질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 사이에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을유문화사, p33-34
욕망(Desire)
루티에게 욕망은 삶에서 너무 중요한 요소인데요. 우리가 어떤 기질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다양한 관계 속에서 “특수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티는 누구나 “특정한 방향을 따르도록 우리를 몰아가는 욕망의 불가사의한 특수성”을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욕망에 충실할 때 비로소 “어떤 것이 진정한 우리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를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항상 심리적 불안을 동반하며,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싶다던가, 부적절한 관계에 끌린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주변 사람들은 대개 우리에게 이러한 욕망을 회피하거나 흘려보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루티는 이러한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간에 불안을 견뎌내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안은 우리가 가진 인상이 기성 문화가 제시하는 이상과 맞지 않더라도, 우리의 욕망과 이상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신호다. 따라서 우리 기질이 진정성을 갖길 바란다면 우리는 욕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즉, 우리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욕망이 불러일으킨 열정의 리듬을 따라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질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반체제적인 성질을 띠며, 열정에 내재된 반항심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기질에 대해 논할 수 없는 것이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을유문화사, p40-41
큰사물(the Thing)
그러나 모든 욕망이 기질의 부름인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인 욕망, 사회로부터 주입된 욕망 등 “진짜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욕망도 우리 안에 어지럽게 섞여 있죠.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욕망의 대상, 바로 큰사물의 울림을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큰사물이란 라캉에게서 가져온 개념으로, 욕망의 대상 중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매우 특별한 것“을 의미하며,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욕망을 건드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직업일 수도 있고, 특별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어떤 강렬한 느낌을 남기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큰사물의 울림‘을 주는 대상을 찾아냈을 때 자아가 실현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반대로 그 대상을 잃어버리고 나면 상상 이상의 커다란 슬픔에 빠집니다. 이처럼 큰사물의 울림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동요는 너무 확실하고 경이로워서 결국에 우리를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합니다.
큰사물의 울림은 순전히 관습적이기만 한 갈망을 능가하기 때문에 아주 경이롭다고 할 만하다. 큰사물의 울림은 우리가 실존적 박탈감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각자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에, (구체적이기보다는 일반적인) 문화적 답안을 답습하는 식으로는 쉽게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큰사물이 우리가 선택한 대상 (사람 또는 욕망) 안에서 충분히 강하게 울리면,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지적하는 사회적 목소리는 압도당한다.
-중략-
그러나 일단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어떤 일에 사로잡히면 주변 사람들의 경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를 둘러싼 목소리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연인을 만나거나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큰사물의 울림이 이성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을유문화사, p40-41
사건(Event)
마리 루티는 이러한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내야만 하는 일종의 ‘삶의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거대한 상업 시스템은 우리에게서 진정한 욕망을 구별해내는 능력을 빼앗으며, 일상 속 큰사물의 울림을 없애버리고 있다고 지적하죠.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삶에 가져다주는 것들을 잘 따라가야 합니다. 사건이란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한 개념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예상치 못한 통찰력의 번뜩임”인데요. 예술가나 과학자, 정치인의 각성처럼 숭고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평범한 일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평소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잠재된 힘이 피어나는 순간이죠. 루티는 사건의 부름에 충실한 인생을 살 때 비로소 자신만의 에너지를 꽃피워낼 수 있으며, 그 에너지로 세상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사회적 생활이 우리를 어떤 순간으로 이끄는 습관과 일상, 생활 계획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특별한 사건은 기질의 요구를 예리하게 일깨워 일상적인 일과와 평범한 관심사의 단조로움 너머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이는 사회의 규범적인 요구 사항에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 안의 자아를 일깨운다. 이 자아는 일종의 “명분”을 찾고 있고, 거침없이 활기차게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자아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만족을 찾아야 하는지와 같은 문화적 기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자아는 자신의 신조가 사회가 옳고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과 일치하는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념, 행동, 만족에 있어 자신만의 고유한 신조를 만든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을유문화사, p217-218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에 스쳐 지나갔던 ‘큰사물’과 ‘사건’들이 문득 문득 떠올랐습니다. 현재까지 제 인생에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떤 강렬한 기억을 남긴 후 지나갔던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런 경험들이 제 인생에 안정이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삶에 중요한 변화를 만든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약간 그리워지면서, “앞으로의 일상에도 그런 강렬함이 또 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의 인생에도 마음을 뒤흔드는 ‘기질의 부름‘이 있으셨나요? 그때 그 부름에 얼만큼 응하셨었나요?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리 루티가 권장하는 삶은 사회에 반항하면서 감정대로 사는 무책임한 삶이 아닙니다. 루티는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지 말고 기질의 부름을 따라서 살라고 말하면서도, 기질을 다시 사회적 역할과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도 함께 강조하고 있어요. 그녀가 추구하는 삶은 기질의 부름을 정직하게 따르면서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나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살피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사회적 자아 속에 녹여내는 성숙하고 책임 있는 삶입니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용기 있게 균형을 깰 줄 아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누구보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인생을 대하는 신중한 철학자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루티가 묘사하는 ‘기질을 사회적 모습에 잘 통합시킨 사람’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기질을 사회적 모습 속에 잘 통합 시켜 낼 수 있는 개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실존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흔히 누군가를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하고 다부진 내면을 갖게 하는 기질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흥미를 느끼며, 종종 겉보기의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끌리지만, 사실은 그들이 용감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질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짜릿하기도 하지만, 정말 두렵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을유문화사, p296
혹시 지금 여러분에게는 ‘큰사물’의 울림을 주는 대상이 있나요? 진부한 일상 속, 조용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나요? 저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마리 루티가 말한 대로 하루 하루에 끈질기게 기질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 순간 확실히 알게 되겠죠?
+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The Call of Charactor : Living A Life Worth Living』 입니다. 직역하면 ‘기질의 부름,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정도로 옮길 수 있을텐데요. 개인적으로 한국어 제목이 원제의 느낌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질‘이라는 단어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까봐 바꾼 것 같긴 하지만요) 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문판에는 등대가 그려져 있어서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기질)를 이정표 삼아 나아가는 이미지가 동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한국판 표지에는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추상화가 그러져 있거든요. 제목과 표지에서 루티의 메시지가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끌리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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